조연출 F의 이야기

과정의 지저분함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이게_사회생활이라면 하고싶지않습니다 | 조연출 F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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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을 흔드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정의로움을 고민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조명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특별한 존재로 그리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그릴 이상향이 헐뜯을 게 없는 것이 되도록, 숱한 글들을 우겨 읽고, 소화시키고, 쓰고, 고쳤다. 드라마는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이라 믿었다. 이윽고 드라마PD가 됐다.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8년에서 10년. 그런데 늘 단어가 그렇듯, ‘버틴다’는 말 하나에도 다양한 정도가 있다.

일주일동안 10시간을 채 못자도 도로가를 달린다. 누가봐도 위험한 사고씬을 만든다. 고장난 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옮긴다. 운에 명을 맡긴다. 열이 40도까지 올라 구토를 하는 막내 스탭을 외면한다. 수십 명이 넘는 스탭 중에 막내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쓰러지면 링거 빨리 맞고 3시간 뒤에 보자고 한다.

6개월씩 집단 생활을 하다보니 사람몰이도 쉬운 장난이다. 놀림거리 하날 만들면, 무시할 거리 하나 만들면 수십 명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보탠다. 매일 깨어있는 20시간 내내 같은 놀림을 받는다. 무용담을 훈장처럼 늘어 놓는다. 우리 예술하는 사람들이니까 좀 거칠지. 얼마나 사소한 일에 화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주 작은 일에도 욕하고 소리치고 분노하고 비난한다. 심술이 얼굴에 붙는다.

한 달에 한 번 가족 얼굴을 스치듯이 보고 나온다. 먼 미래에 내 가족에게도 이렇게 대해야 하겠지 생각하는 찰나, 가족과 친구와 건강을 포기하면 좋은 직업이라는 선배의 덕담이 들린다. 좋은 직업이 뭔가. 돈과 명예와 권력이 따라서 좋은 직업인가. 언제, 10년 뒤에? 시청률은, 운 좋으면? 방송만 나가면 된다. 현장이 엉성해도. 누가 죽더라도. 아사모사 가짜로 때워도. 한달에 50만원, 100만원 받고 24시간 30일을 일한 스탭들이 생활고를 말해도. 방송이 다 나가면 끝이 난다.

과정의 지저분함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송이 끝났는데, 뭘 어떻게 수습할 필요가 있을까. 나조차 ‘이렇게 지나가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진다. 가짜와 가식으로 만드는 드라마에 익숙해진다. 기계적으로 기능한다. 해결된 것은 없는데, 포털사이트와 SNS에서 끊임없이 드라마와 연예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류라고도 한다. 끝없이 입에 오르내리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관심은 곧 돈벌이다. 그 내용을 읽고 있자면 허무해진다. 과연 좋은 드라마였던가.

이한빛PD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에게 해답이 과연 보였을까. ‘버틴다’는 말이 원래 이런 강도였나.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 원두 기계에서 짜내고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가 되는 것을 하루에 20번씩 반복하는 삶과 같다. 누구나 ‘와!’하고 좋아하는 좋아하는 간판을 단 곳에서, 어디 먼 나라에서 가난한 소년들이 딴 원두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뜨겁게 지져서 짜내고 나서, 버려지는 찌꺼기. 그렇게 살기를 버티면 된다.

난 잘 모르겠다. 1000:6, 600:4, 매년 언론고시의 높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수많은 언론고시생들이 청춘을 바쳐 준비하고 있다. 꿈을 꾸고, 이루는 것이 멋지다고들 격려하고 있다. ‘포기’한다는 말을 극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만든 우리 사회에서. 멋지고 높고 가치있는 꿈이라 믿으며 모두들 애쓰고 있다. 시간을 희생하고 있다. 몇 년을 바쳐 나도 그랬다. 그런데 1990년대 직업관이 가르쳐 준 꿈과 2020년대의 꿈은 달라야 하지 않나. 누구도 헐뜯을 수 없는 드라마PD가 되는 것만큼,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행복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렵고 큰 꿈이다. 늦게 알았다.

<편집자 주>

이 글은 혼술남녀 고 이한빛 씨를 추모하며 익명의 조연출F님이 기고하신 글입니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고 이한빛 씨는 지난해 10월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폭력적인 조직문화를 ‘관행’으로 ‘상식적’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 ‘상식'에 반기를 들고 싶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 비상식적인 노동과 조직문화에 대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해시태그 #이게_사회생활이라면 을 달고 전체공개로 글을 써주시면 닷페이스에서 릴레이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전체공개가 부담스러우신 분은 메시지로 글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이게_사회생활이라면